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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교회 낙서장/은광교회

문준경 전도사

by 은혜입은자 2017. 4. 16.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성결교회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1907년에 설립된 한국성결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길어내는 동안 수많은 영욕을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성결교회는 그들만의 특별한 역사적 유산들을 남겨놓았습니다. 여기에 그 유산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이 유산들은 한국성결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I. 성결교회

 

한국인에 의해 성장한 교회

성결교회는 1907년 동양선교회OMS에서 훈련과 지원을 받고 귀국한 김상준정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OMS가 전적인 지원과 리더십으로 함께 했습니다. OMS는 세계성결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선교단체로, 동양에 순복음Full Gospel 곧 사중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고 일본에 동경성서학원을 세웠습니다. 성결교회의 처음 사역자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OMS는 성결교회 창립 초부터 우리나라 서울에도 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을 세워 토착인 사역자 양성에 주력했습니다. 이것이 성결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성결교회가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결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성장한 교파라는 자긍심도 갖게 해 주었습니다성결교회는 전도중심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직접전도에 주력해 왔습니다. 총회 차원에서 운영되었던 지방전도대, 시장전도대, 장막전도대와 같은 전도대는 그 가시적 징표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구령에 대한 진취적인 정신과 뜨거운 열정은 선교지역 분할과 같은 경계선까지도 뛰어넘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교세는 약했지만, 성결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와 달리 초기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교단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중복음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강조합니다. 사중복음이란 중생성결신유재림을 가리킵니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전도 표제이자, 신학과 신앙을 구현하는 주요한 틀로 삼아왔습니다. 사중복음이 성경 중심의 전인적 신앙을 잘 표현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중생重生은 신생新生 혹은 거듭남이라고도 하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신령한 사건입니다. 성결聖潔은 성령세례라고도 하며, 거듭난 자를 온전한 사랑과 승리의 삶으로 이끄는 이차적인 은혜입니다. 신유神癒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재림再臨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으며 종말론적 소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성서적 체험 신앙

성서적 체험 신앙의 전통, 이는 다른 교파와 비교해서 뚜렷이 부각되는 성결교회의 특징입니다. 성결교회는 이 땅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부흥운동을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김상준, 정빈, 이명직, 이성봉, 김응조, 이만신 등은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며, 한국교회에도 널리 알려졌던 부흥사들입니다.

성결교회의 부흥운동은 건전하기로 유명합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중복음의 메시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회심 체험, 이차적 은혜로서의 성결, 기적적인 신유의 역사, 종말론적 신앙은 부흥운동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런 성서적 메시지와 체험의 결합은 교리의 화석화와 극단적 신비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중재자

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연합운동에 간헐적으로 참여했으나 해방 후에는 연합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도 상당히 커졌습니다. 최근에도 보수진영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나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갖고 연합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중재자로 양진영의 환영을 받으며 연합운동의 가교 및 완충지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교회의 복음적 신앙과 건전한 신학이 보수와 진보를 함께 아우르는 포용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보수적이나 경직되지 않고, 포용적이나 방임적이지도 않은 묘한 긴장과 균형이 성결교회의 신앙과 신학에는 깃들어 있습니다.

 

웨슬리안 복음주의

성결교회는 웨슬리안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정신은 교회사를 통해 널리 표출되었으나, 성결교회는 크게 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웨슬리 부흥운동, 19세기 성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결교회는 개신교 복음주의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노선과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반대하며, 복음주의 내에서도 칼뱅주의 노선과 구별됩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성서의 권위, 회심 체험, 십자가 중심, 전도와 선교의 사명 등에 대한 강조를 주된 특징으로 합니다. 복음주의는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신뢰하며, 삶의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회심 체험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복음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또한 복음전도와 선교에 우선권을 두고 강조합니다. 성결교회는 복음주의의 이런 유산을 풍부하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수난 및 순교적 영성

성결교회는 '가시밭의 백합화'를 교단의 상징으로 삼아왔습니다.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앙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수난 및 순교적 영성을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교회는 시작부터 기존 교파의 텃세 및 괄시를 맛보아야 했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재림신앙으로 저항하다가 교단마저 강제해산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강경교회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진원지로 수난을 받았고, 박봉진 목사는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박현명 총회장과 이건 교장 등 교단 지도자들이 대거 납북되었고, 문준경 전도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 증동리교회를 비롯해 임자진리교회, 병촌교회, 두암교회 등도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앞에 집단적 수난과 순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 순교자의 수가 16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증동리교회의 수난

신안지역에서도 성결교회는 수많은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가 개척한 증동리교회도 그런 수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1930년대 말, 불한당들은 예배당을 강제로 경방단에 팔아넘기는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경방단은 일제말 치안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조직으로, 위안부와 징용자들을 송출하는 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친일단체입니다. 경방단의 우두머리는 바로 조선인이었습니다.

문 전도사는 그 와중에 거의 매일같이 일본 경찰에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취조 후 마을로 돌아올 때면 문 전도사는 항상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문 전도사는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 전도사를 보며 일본 경찰들도 결국 두 손을 들었고, 교인들은 더욱 굳게 단결했습니다.

해방의 그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샀던 마을 유지는 그것을 되돌려줄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텼습니다. 이에 문 전도사는 목포 지방법원에 소송을 했고, 증도에서 목포를 수없이 오고 간 끝에 예배당을 되돌려주라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마침내 빼앗겼던 교회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II. 인간 문준경, 고난과 삶

 

1. 출생

신안의 작은 섬에서

문준경은 18912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 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외딴 섬이었지만, 진사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가정의 살림살이는 비교적 넉넉했다. 암태면은 증도 아래, 자은도 옆쪽에 있는 섬 암태도를 가리킨다. 암태도는 증도보다 조금 큰 섬으로 돌이 많아 흩어져 있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암태도라 불리게 되었다.

 

2. 성장

총명한 여자아이

소녀 문준경은 넉넉한 양반 가문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격은 유순했으며 그 지혜와 총명함도 남달랐다. 고운 마음씨를 가졌던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꼭 뭐라도 도와줘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하인들도 그녀를 마음씨 고운 주인댁 따님으로 불렀다. 이런 그녀를 부모와 조부모들은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다.

 

명석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는 남자들처럼 글을 익히고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의 굴레가 얹혀진 반면, 교육과 복지로부터는 철저히 소외당했던 조선 여자들. 그들에게 여자로 태어난 것은 그 자체로 무거운 죄였다.

 

3. 교육

어디 여자가 글을

문준경은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해서 세상 사정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날에 대해서도 뭔가 의미있는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하루는 드디어 작심을 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저도 오빠들처럼 글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 글 한 줄 읽을 수 없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제 여자도 글을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요?" 간절한 소원을 담아 그간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일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냐? 여자가 살림 잘 배워서 좋은 남편 만나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지. 뭐 할 게 있다고 글을 배워?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애기 꺼내지도 마라.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썩 물러가거라!" 남존여비사상이 깊이 뿌리 박혀 있던 시절, 아버지는 자식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기보다 두 번 다시 남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호통만 쳤다. 사회적 관습의 벽이 그렇게 높았던 것이다.

 

4. 유년시절 에피소드

훈장노릇

어느 날, 문준경은 훈장 선생님이 출타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당으로 달려 갔다. 학동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그녀는 훈장님의 책상 앞에 앉아 갓을 집어 쓰고 긴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돋보기 안경을 콧잔등에 걸치고 아이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글을 가르치는 시늉을 했다. 영락 없는 훈장의 모습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훈장은 그녀의 모습에 꾸중대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칭찬해 주었다. 묻는 말에 똑똑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매우 흡족했던 것이었다.

 

5. 결혼

열일곱의 생과부

열일곱 살이 될 무렵부터, 문준경에 대한 혼담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집안이 좋은데다가 어려서부터 워낙 마음씨 곱고 총명하고 아리땁기로 소문이 나 있어 혼담이 줄을 이었다. 당시 혼사는 양가 어른들끼리의 약속이었다.

 

남편은 지도면 등선리에 사는 정근택이라는 사람이었다. 남편 정근택은 결혼 첫날부터 문준경을 아내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 있는 생과부라 부르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다. 외롭고 힘든 세월을 참고 또 참으며 보냈으니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남편 정근택은 결혼 전부터 이미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을 임금처럼 높고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문준경은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섬기며 효성을 다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하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6. 배움

한글을 깨치다

문준경의 결혼 생활 중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시아버지였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그녀를 조용히 불러 한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고, 그녀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디에라도 글을 써 가며 익히고 또 익혔다. 밤에는 어두운 초롱불 밑에서 글을 배웠다. 밤낮으로 글 배우는 일에만 몰두를 했다나중에 그녀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빠른 시간 안에 깊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틈나는 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기 때문이었다.

 

7. 고난

재봉틀과 삯바느질

시집살이에 유일한 위안과 희망이 돼 주셨던 시아버지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남편 없는 시댁에서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셨던 분이 바로 시아버지였다. 남편 없는 시댁에서는 살 수 있었지만 시아버지가 안 계신 시댁에서는 살 이유가 없었다. 시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후, 그녀는 20여년을 살던 증도를 떠나 친정 오빠가 살고 있는 목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목포 북교동 근처에 단칸 셋방을 얻어 살면서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 나갔다.

 

III. 예수님을 영접하다.

1. “문준경을 찾아오신 예수님

"아무도 안 계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어느 날 문준경의 방으로 한 여인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꺼낸 후 여인은 책 두 권을 꺼냈다.

무슨 책인가요?”

자매님,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뜨거운 지옥의 불구덩이입니다. 자매님, 사는 게 얼마나 고되고 힘들며 헛됩니까?”

자신의 운명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한 여인의 말에 문준경은 신기함을 느꼈다.

여인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세상에 정말 믿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믿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에 대해 더 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문준경은 빛나는 눈으로 대답했다.

손님, 저는 손님의 말씀이 뭐가 뭔지 통 알아들을 수 없네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자세히 알아보고 싶네요... 괜찮으시다면 편히 앉아서 쉽게 설명을 해주세요.”

그날의 대화는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랜 대화 후 문준경은 가슴에 새로운 빛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지금까지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이 살아왔는데 이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새로운 인생을 한번 살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믿어 보자. 이것이 내게는 마지막 기회야.’

고난으로 가득했던 문준경의 삶 한가운데로 예수님이 천둥처럼 들어오시는 순간이었다.

 

2. “문준경을 찾아오신 예수님

192735, 평소와 다름없이 부지런히 삯바느질을 하고 있던 문준경에게 비슷한 또래의 점잖은 부인이 찾아왔다. 날이 저물 때까지 오랜 대화를 나눈 문준경은 처음 보는 부인 앞에서 지난 날들을 고백하며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문준경이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는 소중하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3. “난생 처음 교회에 나가다

문준경은 다가오는 주일 북교동에 있는 초가교회에 나가기로 그 부인과 약속을 했다. 난생 처음 교회로 나가던 날, 문준경은 그녀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전도사이던 장석초 목사였다. 문준경은 이 교회에서 장석초 목사의 도움으로 세례까지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4. “예수님을 영접하다

문준경은 교회에서 목청껏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어느 순간,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 것이라!”

문준경의 영혼이 담긴 기도와 찬양이 응답을 받는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5. “사역의 삶을 시작하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신안의 여러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문준경 집사는 자신의 성경지식이 너무 부족함을 절감하였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더욱 체계적인 학문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에 그녀는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성봉 전도사를 찾아가 그녀의 소원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했다. 이성봉 전도사는 문준경의 신앙과 이후 사역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문준경 집사의 간절한 소원을 알게 된 이성봉 전도사는 그녀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기도하면서 노력하였다. 입학 규정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간절한 소망은 마침내 경성성서학원의 문을 열고 배움의 길로 들어서게 해 주었다.

 

IV. 사역을 준비하며

1. 깨우침과 훈련의 나날들

1931년 봄, 문준경 집사는 어렵사리 서류를 갖춰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이성봉 전도사의 추천서 한 장이 전부였다. 그녀는 면접과정에서 학교 규칙상 '남편이 있는 부인은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형편을 토로하고 통사정하며 매달리자, 이명직 원장은 그녀를 정식학생 신분이 아닌 청강생 신분으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193151일 이때 그녀의 나이 만 40세였다.

 

기쁜 마음에 학업에 전념했지만, 청강생의 신분은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었다.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어 학비 외에도 비싼 하숙비와 생활비가 따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계속 청강생으로 지내는 것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문준경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이 일로 하나님께 어려움을 호소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너무 또렷하고 생생한 환상에 놀라 그녀는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기도를 드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문준경은 정식 학생이 되었다. 이성봉 전도사의 신원 보증과 간곡한 부탁을 이명직 원장이 받아주었던 것이다.

 

경성성서학원은 6년제 학교였다. 1년 내내 공부만 한 게 아니라 3개월은 공부하고 9개월은 단독으로 교회를 개척하도록 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실습기간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섬 지역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녀가 청강생으로 있으며 첫 9개월 실습기간 동안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임자 진리교회였다.

 

V. 4인의 멘토

성결교의 성결성을 보여준 장석초 목사

장석초 목사는 목포 성결교회를 설립하고 임자도 진리와 압해도, 암태도 등의 섬 지방에서 헌신적으로 선교에 임하신 분이다. 충남 서천군에서 당대 거부이자 유교 가문의 외아들로 출생한 그는 교직을 포기하고 경성성서학원에 입학, 목회자로서의 일생을 걸었다. 문준경은 1927년부터 24개월간 당시 장전도사로부터 깊은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신앙의 기초를 다졌고, 세례와 집사 직분까지 받는 등 신앙생활의 터전을 다졌다. 장석초 목사의 철저한 신앙과 언행일치의 믿음은 문준경의 신앙생활에 큰 가르침이 되었다.

 

신유의 은사를 체험한 김응조 목사

김응조 목사는 매우 학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왕성한 연구 활동과 복음전도의 열의로 문준경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준경의 신학교 입학에 대한 결단도 김응조 목사의 목회시점과 일치한다. 김응조 목사는 과로로 인해 신경쇠약, 소화불량, 폐렴, 피부병, 신경통, 치질, 종기 등 수많은 병마에 시달렸으나, 한 달간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일곱 가지 질병을 몰아내고 자유를 얻게 되는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였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 후원자 이성봉 목사

한국 교회가 낳은 전설적인 부흥사 이성봉 목사는 문준경의 사역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큰 도움을 주며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 왔다. 문준경과 이성봉 목사의 만남은 1931년 목포에서 이루어졌다. 사역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문준경이 경성성서학원으로 입학하는 것을 지원한 것 뿐 아니라 그녀가 증동리교회 담임전도사로 사역할 때에도 치리 목사로서 사역을 도와주었다. 문준경이 신앙적 배움을 얻고, 성공적으로 사역한 배경에는 이성봉 목사의 물심양면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소명자의 길을 열어준 이명직 목사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큰 스승"이었다. 그는 문준경이 사역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배움의 문을 열어주었다. 문준경은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했다. 학교 규칙상 남편이 있는 여인은 전도부인 사역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입학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이명직 목사가 경성성서학원 원장으로 있었는데, 문준경의 간절한 소원을 물리칠 수 없어 청강생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이성봉 전도사로부터 문준경에 대한 사정을 전해 듣고 규칙을 어기고 정식 학생으로 받아준 것도 이명직 목사였다. 문준경이 즐겨 불렀던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장수는 바람잡이요."로 시작하는 <허사가>는 이명직 목사의 작품이었다. 문준경은 무려 16절이나 되는 가사를 다 외우고 있었다.

 

VI. 박애와 헌신의 삶

1. 천사의 섬, 신안으로

경성성서학원에서 체계적 신앙의 배움을 시작한 문준경 전도사는 신안지역으로 내려와 교회를 개척하고, 헌신적으로 선교에 임하였다. 많은 어려움과 외면 속에서 묵묵히 행한 박애와 헌신의 전도는 조금씩 섬 주민들을 움직이고, 섬들을 영성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마을의 전도자이자 어머니였다. 그녀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신안지역에는 100여개가 넘는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세웠던 교회와 기도처들 11곳이 바로 그 씨앗이 되었다. 그녀가 순회하며 섬겼던 여러 기도처들도 후에 교회로 성장했다.

 

2. 임자도 진리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처음으로 개척을 시작한 곳은 임자도였다. 신학교 청강생으로 처음 맞이한 실습기간을 이용해 남편 정근택씨가 소실과 함께 살고 있는 임자도를 찾아갔다. 정식 학생자격을 갖추기 위해 허울뿐인 남편과의 부부 관계를 법적으로 청산하고,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가장 큰 상처부터 치료하고자 했다. 남편과 소실을 먼저 믿게 해야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과 소실은 그녀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임자도에 들어와 그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갖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며, 다른 이들과 함께 극렬하게 교회개척을 훼방했다. 당장 때려치우고 섬을 떠나라는 욕설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핍박하는 이들을 맞상대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저 묵묵히 자기 일에만 몰두했다. 부지런히 이집저집을 다니며 전도하고, 그녀의 장기인 찬송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러는 사이 마을 사람들의 방해도 점점 수그러들었다. 몇몇 부인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하면서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낮은 자들의 어머니가 되어 헌신적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3. 증동리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두 번째로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증동리교회였다. 이 마을은 그녀가 20여 년 동안 생과부로 살았던 시댁이 있던 곳이다. 그녀가 비참한 결혼생활 속에서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교회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증동리교회는 증도의 복음화율이 90%를 넘기고, 신안지역을 복음화하는 데 핵심 센터가 되었다.

 

증도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큰 시숙 정영범씨였다. 정영범씨는 동생의 잘못을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제수씨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전도하자, "제수씨처럼 착한 사람이 믿는 종교라면 나도 믿어야죠. 제수씨 말 들어서 손해날 게 뭐가 있겠어요." 하며 흔쾌히 예수를 받아들이고, 온 가족을 이끌고 교회로 나왔던 것이다.

 

정영범씨는 자신의 텃밭도 선뜻 교회 부지로 내놓았다. 그 터 위에 문전도사와 교인들은 한밤중에 횃불을 밝혀 놓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당을 지었다. 교회를 건축한 후에는 이성봉 목사를 모셔다가 학습 세례식을 하고, 부흥회도 열어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사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악의적인 소문으로 문전도사를 괴롭혔다. 하지만 핍박하고 괴롭혔던 사람들도 그 후 예수를 믿고 교회의 충성된 일꾼이 되었다. 문전도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친아들이나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보살폈다.

 

 

4. 대초리교회

대초리교회는 문준경 전도사가 세 번째로 개척한 교회다. 대초도(전증도)와 증도(후증도) 간에는 노두길이라 하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문전도사는 노두길로 두 섬 사이를 왕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대초리에는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언니가 복음전도의 거점이 되었다. 틈 날 때마다 증동리와 대초리를 오가야 했던 그녀에게 노두길은 암초 같은 존재였다. 그나마 낮에는 덜 위험했지만, 밤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2.5km의 노두 길을 건너다 바닷물이 밀려와 자칫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찬송을 부르며 두려움을 물리쳤다.

 

대초리 사람들은 증동리 사람들에 비해 폐쇄적이었다.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악담을 퍼부어댔지만, 문전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에 전도를 거듭한 끝에 자그마한 예배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 불량배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전도사의 길을 막고 욕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옷을 잡아 찢기도 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술을 마시고 나타나 큰 소리를 지르며 방해하기도 했고, 교회 옆을 지날 때면 항상 침을 뱉고 욕을 해댔다. 하지만 변함없이 자신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복음을 전하는 그녀를 보며 그들의 마음도 움직였고, 결국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마을 사람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그들마저 결국 그녀의 사랑에 감복하여 주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5. 우전리교회

우전리교회는 문전도사가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에 세운 기도처에서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반나절이 넘는 노두길을 건너야 그곳을 찾을 수 있었던 외딴 섬이었다. 보통 사람이야 일 년에 고무신 한 켤레면 되었지만, 문전도사는 일 년에 아홉 켤레의 고무신을 신어야 했던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옮기는 그녀의 발걸음은 뻘을 지나고 노두길을 지나는 험한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우전리에 사는 안씨 집안에 딸이 있었는데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의원을 부르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딸이 낫지를 않았다. 그때 '어떤 중병이라도 문전도사가 기도하며 돌보면 낫게 된다'는 소문을 듣고, 그 부모가 딸을 문전도사에게 맡겼다. 문전도사의 사택은 마치 "목민 센터"와 같았는데,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고아와 과부처럼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이 모여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문전도사의 기도에는 정신병자와 중풍병자 등 각종 병을 낫게 하는 신유의 은사가 따랐다. 실제로 많은 병자들이 나음을 입었으며, "섬 의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안씨의 딸도 문전도사의 사택에서 3개월 정도 요양하다가 병이 낫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전리 기도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6. 방축리교회

방축리는 증동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방축리에 사는 신자들은 처음에 증동리교회로 다녔다. 점차 방축리에 사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밤중에 산길을 오가는 일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6년 방축리에 기도처를 따로 세우게 되었다. 신자들이 직접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기도처를 지었고, 당시 기도처를 섬겼던 사람들로는 최우용, 박석천, 박철석씨 등이 있다. 이처럼 방축리 기도처는 혼자 대신 짐을 지고 여러 사람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동시에 주변에 복음을 널리 확장하려는 계기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문전도사는 방축리에서 1km 떨어진 어산 부락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방축리에서 사역을 하고 돌아갈 때면 어산 부락에 들러 복음을 전했다. 그곳에는 이정신씨가 사는 전주 이씨 종가집이 있었다. 문전도사는 그 집안을 집중적으로 전도하였고 여러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문전도사의 순교 후, 방축리 기도소는 증동리교회로 병합되었다가 이후 방축리에서 왕래하는 신자가 많아지면서, 1983년에 분립하여 증동리에서 2km 정도 떨어진 어산 부락에 방축리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7. 재원교회

재원교회는 임자도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 재원도 예미 마을에 세워졌다. 문전도사가 예미 마을에 세운 기도처가 발판이 되었다. 이판일 장로(임자 진리교회)의 딸이 예미 마을로 시집오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문전도사가 순회전도 하면서 기도처가 세워지게 되었다.

 

문전도사가 즐겨 사용했던 전도방법 가운데 하나가 친인척을 찾아다니며 관계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심었다. 방축리교회, 사옥교회, 자은제일교회(고장교회), 팔금원산교회, 지도봉리교회, 한마음교회(등곡교회) 등은 그런 헌신의 열매들이다.

 

VII. 가슴으로 행한 사랑

1. 재봉틀

성서학원에 다니던 도중 어느 날 한 여학생이 울면서 문전도사에게 찾아왔다.

고향에 계시는 홀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내려가 봐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남의 어려움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성품인 그녀는 생각 끝에 자신의 재산목록 1호인 손재봉틀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마련해 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면 그녀는 오히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신데 설마 친딸인 저를 굶어 죽도록 그냥 놔두시겠어요?”라고 답하곤 했다.

 

 

2. 대초리 예배당

문전도사의 선교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단의 사내들이 대초리 예배당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려고 했다. 문전도사가 저는 대초리에 해를 끼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전해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고 행복하게 잘 살도록 만들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며 그들에게 따뜻한 말로 '마을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다독였다. 그러자 사내들은 쭈뼛거리다가 하나 둘 되돌아갔다.

 

 

3. 돛단배

문전도사는 돛단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며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였다. 진리, 증동리, 대초리에 각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마을 중간 중간에 기도처를 만들었는데, 우전리, 재원, 방축리 등이었다. 이 기도처는 나중에 훌륭한 교회가 되었다.

섬과 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은 작은 돛단배가 전부였다. 하루는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심했는데 증도에서 임자도로 가기 위해 무리하게 배를 띄우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거세지면서 무섭게 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배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위험에 빠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호들갑을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순간 문전도사는 사공이 놓아버린 노를 부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여기서 죽는다면 불쌍한 우리 어린 양들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저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전도자가 되었으니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제 막 개척한 교회에 나와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남은 사명 끝까지 완수하고 죽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말씀 한마디로 바람을 잔잔케 하신 주님. 이 파도와 바람을 잔잔케 하여 주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어느 순간 기적처럼 바람이 잔잔해졌고 파도도 감쪽같이 멈춰버렸다. 문준경 전도사는 배 위에서 감사 찬송을 불렀다. 같이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함께 찬송을 따라 불렀다. 나중에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4. 전염병

증동리에 장티푸스, 흔히 염병이라 불리는 전염병이 돌았다. 한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 전체가 전염되었다. 죽는 사람이 속출했지만 환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전염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다. 이때 문전도사가 환자의 집에 들어가 시체를 옮겨 조촐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교인들이 전부 문전도사를 말렸지만 문전도사는 시체들이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는데 어찌 그냥 두고만 보겠습니까? 이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죽어도 하나님 뜻이고 살아도 하나님 뜻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기도만 해 주세요하고 대답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5. 노두길

증동리와 대초리를 오가며 교회를 개척하던 문전도사에게 노두길은 암초 같은 존재였다. 돌들을 던져넣어 만든 노두길 양옆으로는 항상 바닷물이 넘실댔고, 자칫 잘못하면 불어난 바닷물에 갇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험한 시험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노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줍소서.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 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줍소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문전도사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두려움을 물리쳤다.

 

 

6. 이판일 장로 전도

문전도사가 행한 이판일 장로 전도사역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어느 날 양석봉 전도사와 함께 이판일을 찾아간 문전도사는 하나님의 강한 권세에 힘입어 이판일의 회심을 이끌어냈다. 예수를 영접한 이판일은 그 자리에서 담배꽁초와 담뱃대를 부러뜨려 아궁이에 던져 넣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훗날 이판일 장로와 일가 13명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기 어려운 순교의 역사를 남기게 된다.

 

 

7. 산파 문준경

문전도사는 산파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산모에게서 아이를 받고 돌보며 키우는 데는 선수였다. 중동리교회 이영철 집사는 쌍둥이를 포함해서 모두 일곱 남매를 낳았는데, 이 아이들을 모두 그녀가 받아서 돌봤을 정도였다.

산파역 뿐 아니라 그녀는 어떤 때는 의원 역할, 또 어떤 때는 집수리에 도배까지 하는 등 섬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서 도우며 몸으로 행하는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VIII. 사람들의 증언

정태기 목사

- 증도가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는 전적으로 문준경 전도사님 때문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섬 사람들은 미신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문준경 전도사님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미신을 버리게 됩니다.

 

임귀례, 이영철

- 목소리가 좋아 찬송을 잘 불렀어요. 사랑이 너무 풍부했고요. .... 전도 장소가 불충분해서 남의 마당을 빌려 거기 천막을 치고 전도를 시작했어요.

 

박복엽권사

- 문준경 전도사님이 암태면 도창리에 오시면 찬송 배우려고 무조건 이집 저집 막 따라다녔죠.... 못하는 일이 없으셨어요. 아기 낳는 데는 산파도 그런 산파가 없었죠.

 

김준곤 목사

- 소화제니 먹으라고 주시고 때로는 아픈 부위를 만지시며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쓰다듬듯 하셨는데. 기도하는 그 모습이 제 마음에 확 박혀 있습니다. “이 자매는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여기 병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십시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신기하게 낫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치유하십니다.

 

IX. 순교 ; 더 큰 사랑의 실현

살길을 마다하고 순교를 자처한 문준경

6.25전쟁으로 쳐들어 온 공산주의자들이 문전도사님을 체포하여 즉결 처분하지 않고 목포 정치보위부로 이송 수감시켰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의 상륙으로 인민군이 철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풀려난 그녀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 발악하는 인민군들이 교인들을 해칠 것을 생각하여 나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러 가야 한다.”며 나섰다.

 

이때 이성봉 목사가 잠시 안전한 곳으로 피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녀는 수양딸 백정희와 증동리교회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풍선(돛단배)을 타고 목양지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며칠 뒤에만 들어갔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있었으나 목자의 사명감에 증도에 돌아간 그녀는 1950105일 새벽 2시경 체포되어 인민군들에게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 발로 차이고 창에 찔리고 총대로 후려침을 당하고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양딸 백정희와 성도들은 살려 달라 부탁하였다.

아버지여 저들에게 죄를 묻지 마시고, 죄 많은 내 영혼을 받으소서.”

칠흑같이 어두운 증동리 앞 백사장, 문준경 전도사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5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다음은 고 박복엽 권사의 증언이다.

머리에 창을 찍어 쭉 찢어졌습니다. 이마가 찢어졌어도 목이 멀쩡하니 얼마나 소리를 지르셨겠습니까? 소리를 지르시니 목부분에 총을 쏴서 이마와 목에서 피가 막 쏟아져서 버선까지 흠뻑 젖어 옷을 벗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모래사장에 방치된 시신을 8일 만에 수습하라고 허락해서 갔는데 무더위와 가뭄 때문에 햇볕에 익어서 시신의 얼굴 껍질이 다 벗겨졌고 피와 옷과 살이 말라붙어 옷도 못 벗겼습니다.”

 

X. 그가 남긴 것들

1. 문준경 전도사의 기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살아온 생애, 이 한 목숨 죽어도 주님 이름 때문에 죽는다면 그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는가?"

 

"상천하지의 하나님은 한 분 뿐이요, 우리의 대화에 말없이 듣는 분이시니 당신의 오만한 말을 용서해주길 기도할 뿐입니다. 죽기로 각오한 이 몸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소만 당신들도 속히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기만 바랍니다. 속히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내 양심은 지금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2:20)이란 말씀이 내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저도 못 다한 기도를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처럼 사랑스런 언어로 마지막을 장식한 순교자 스데반의 기도를 지금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한 많은 나의 삶을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주신 큰 은혜 말로 다할 수 없는데 이렇게 육신의 고통을 넘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저를 인도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부족한 내 영혼 당신의 손에 의탁하오니 비천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2. 뒤를 이은 순교와 사랑의 실천 이판일 장로, 이인재 목사

이판일 장로 일가의 순교

1950104, 이판일 장로와 함께 밀실에 모여 예배를 보던 진리교회 성도들은 몽둥이와 죽창을 든 공산당원에 의해 끌려 나왔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예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 하며 회유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손을 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손만 들면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거룩한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결국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 형제의 가족 13명을 포함한 성도 48명이 105, 공산당원에 의해 무참히 순교를 당하였다.

 

목포에 나가 있던 이판일 장로의 아들 이인재 목사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뒤늦게 돌아온 그는 무참한 광경을 목도하며 순간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 죽으면 부모형제 따라가는 것이고 살면 집안을 잇는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라' 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3. 이인재 목사의 용서와 기적 같은 사랑

처참한 살육의 비극이 있고 난 후 순교의 기적을 뛰어넘는 용서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었다.

임자도에서 일어난 48명의 순교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해군부대가 섬으로 상륙했고, 해군은 참관인으로 이인재 목사를 동행하도록 했다. 반나절이 걸린 좌익인사 검색과정에서 사람들은 이인재 목사에 의해 태극마크가 달린 완장으로 생과 사가 갈리는 숨 막히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과 교인들에게 해를 가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이인재 목사가 그들 모두를 용서한 것이다.

가족을 죽인 원수에게 보복 대신 용서를 행한 이인재 목사의 사랑은 임자도를 성령의 부흥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기적의 섬으로 만들어 냈다.

 

4. 문전도사님을 기억하며 - 김준곤 목사님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이다. 전도사님은 내가 초등학교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 한 아름의 과자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문전도사님이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 간 지낸 적이 있다. 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가족도 환자 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 순교 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 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 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5. 증도 안에 있는 11개 교회들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 우전리교회 병풍교회 장고리교회 소악교회 방축리교회 기점교회

염산교회 화도교회 증도제일교회

 

6. 순교의 의미

한국의 성결교회가 지금과 같이 성장을 한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초기 사역자들의 희생정신, 순교영성이 밑거름이 되었다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그 결실은 순교 영성이다. 기독교라는 커다란 나무에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근본이 순교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순교는 고난 이상의 고난으로 우리 영혼이 각성되는 중요한 통로이며 필수적이기조차 하다.'고 하였으며,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부흥의 씨앗'이라고 하였다.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평탄한 간증의 사람들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말하는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문준경 전도사는 죽음으로서만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보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순교자의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믿음의 산 증인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만을 위해 살지 않았다. 오직 그녀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다. 실로 그녀는 기독교 지도자의 참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로서 행동으로서 잘 보여준 믿음의 영웅이다.

 

이같이 자랑스러운 믿음의 실천가를 통해서 우리도 살아 있는 영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믿음을 바라보고 감동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따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의 뒤를 따르는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문준경전도사 (문준경순교기념관 자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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