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1. 삼손의 행동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사명에서 출발하기보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분노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됩니다. 아내를 빼앗긴 삼손은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에 분노했고, 그 분노는 블레셋의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불태우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이고, 삼손은 또다시 보복합니다. 이렇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으며 죽음의 악순환을 만들어 냅니다. 삼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다스리는 힘은 부족했습니다. 천 명을 죽일 수 있는 힘은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데에는 약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삼손의 개인적인 복수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셨지만, 그렇다고 삼손의 모든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과 행동 속에서도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도 상처와 분노를 하나님의 뜻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옳으니까", "상대가 먼저 잘못했으니까"라는 이유로 내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2. 삼손의 복수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유다 사람들의 영적 무감각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에 쳐들어오자 유다 사람 3,000명이 삼손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블레셋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그들이 얼마나 블레셋의 지배에 익숙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블레셋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블레셋과 싸우는 대신 삼손을 결박하여 대적에게 넘겨줍니다. 영적 무감각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죄와 타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타협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에는 죄와 싸우는 것보다 죄에 적응하는 것이 편해집니다. 우리도 유다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너무 익숙해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방식에 적응하며, 어느 순간 그것을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사라지고, 죄에 대한 거룩한 긴장감이 사라지면 신앙은 겉모습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을 죄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삼손의 문제는 지나친 행동이었다면, 유다의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감각이었습니다. 하나는 분노에 사로잡혔고, 다른 하나는 압제에 길들여졌습니다.
3.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삼손은 극심한 갈증으로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천 명을 죽일 힘은 있었지만 자신의 목마름 하나 해결할 힘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삼손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삼손은 그곳을 ‘엔학꼬레’,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부릅니다. 삼손의 힘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현실적인 타협이 생명을 보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삼손은 사람을 죽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주셨을 때 비로소 살아났습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돈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 줄 것 같고, 능력과 경험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으며, 사람들의 인정이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 힘으로는 나 자신을 살릴 수 없구나."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결국 엔학꼬레로 돌아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분노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무기력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한계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삼손에게 엔학꼬레의 샘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생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나 완전함 때문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삼손의 복수에서도, 유다의 무감각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상처를 복수로 풀지 않고, 죄와 세상의 압제에 익숙해지지 않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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